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F. 케네디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케네디가 1961년 1월 취임한 후, 케네디 행정부 안에선 [[4.19 혁명]]의 여파로 1960년 6월 들어선 [[장면]] 내각이 '위기 대처 능력이 떨어져 민중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런 노력이 실패해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5.16 군사정변|최악의 군사정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케네디 행정부는 특사와 보좌관을 한국에 보내 경제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장면 총리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2차대전 직후 일본에서의 GHQ 방식을 연상시키는 사실상의 신탁 통치도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5.16이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벌어진 후 이를 보고받은 케네디는 "절망적 상황(a hopeless situation)"이라며 좌절감을 드러냈다.[[http://m.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243139&referer=https%3A%2F%2Fwww%2Egoogle%2Eco%2Ekr%2F|#]][* 5.16 당시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이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당시 (장면과 사이가 좋지 않던) 윤보선 대통령은 오히려 이를 말리는 포지션을 취했고, 장면 총리와는 연락이 되지 않아서 포기한 사실이 있다.]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취임사에서도 보이듯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신생국들이 [[독재]] 등 더 가혹한 환경에 놓여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 그의 가치관 및 노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케네디는 정치적 혼란, 빈곤에 허덕이던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냥 내버려둘까 고민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북한]]이 또 남침하기라도 하면, [[냉전]] 당시 진영 싸움에서 밀릴까 우려한 케네디는 1963년 조기 대선을 치르겠다는 당시 군사정부의 타협책 등을 반영해서[* 베트남 파병도 미국에 잘보이기 위해 이때 군사정부가 먼저 거론하는데, 케네디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후임인 린든 존슨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국군 파병이 결정된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한국에 계속 원조를 제공한다.[* 케네디 정부와 군사정부가 겹치던 시기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3%대로, 개도국 시절임을 감안해도 매우 저조했다. 이를 보면 미국의 지원이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1961년 11월, 그러니까 5.16으로부터 불과 반년 만에 케네디는 [[https://www.jfklibrary.org/asset-viewer/archives/JFKWHP/1961/Month%2011/Day%2014/JFKWHP-1961-11-14-C|당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를 백악관에서 접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의 상황이 지긋지긋했는지, 1962년에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소설가 [[펄 벅]]을 만난 케네디는 아시아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고는 펄 벅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내 생각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오.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일제 강점기|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소"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해 벅이 "그건 마치 우리 미국이 예전처럼 영국 지배로 돌아가라는 소리와 같지 않습니까?"라고 답변하자 그도 [[농담]]이라는 투로 물러났다고 한다. 카더라성 일화일 수도 있지만, 피터 콘이 저술한 펄 벅 평전에서도 나온다는 걸 보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